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 중에서.

"어쩐지 여기, 서울 같지 않아."
언니가 잠 묻은 말투로 대꾸했다.
"서울 다 이래. 네가 아는 서울이 몇 곳 안 되는 것뿐이야."

*

나는 어서 학교에 가고 싶었다. 얼추 한 학기 등록금을 모았고,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피로'나 '긴장'을 느끼고 싶었다. 긴장되는 옷을 입고, 긴장된 표정을 짓고, 평판을 의식하며, 사랑하고, 아첨하고, 농담하고, 험담하고, 계산적이거나 정치적인 인간도 한번 돼보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가전제품뿐이었다. 나는 냉장고에게 잘 보이거나, 전기밥통을 헐뜯고 싶지 않았다. - 중략 -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하져 있었다.

- 도도한 생활




그녀는 '그러니까'와 '그렇지만' 사이의 깊은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선잠에 빠져 든다. 물론 직장에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는 데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결심이 아닌 '주저'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주저의 순간, 자신에게도 삶에 대한 선택권이 약간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는 것도. 그녀가 화들짝 깨어난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정신병자처럼 외친다. 몇 시지? 늦은 건 아니지만 늦을지도 모르는, 세계 도처에 깔린 우리들의 난처한 시간 - 그 어디 즈음의 몇 시 몇 분이다.

*

가끔 인생의 어떤 부분을 가불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없지 않지만, 한 1년 묵묵히 공부한 뒤 공기업에 취직하는 후배들을 보며 질투가 날 때도 있지만. 경제적 독립이 주는 떳떳함과 함께 술자리에서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지인들의 경조사에서 사람 노릇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녀가 학원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울러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월급날은 번번이 용서를 비는 애인처럼 돌아왔다.

- 침이 고인다



두 사람은 영화를 봤다.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영화는 지루했지만 그들은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엔 극장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대기석에서 30분도 넘게 기다린 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여자는 오늘 자신의 옷차림이 마음에 들었고, 남자는 오래전 종이컵에 적었던 일정을 하나씩 이뤄가는 것 같아 기뻤다. - 중략 - 남자는 리필된 탄산음료를 빨대로 빨며 주위를 둘러봤다. 똑같은 테이블보 때문인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다. 남자는 닭고기에 쓰인, 겨드랑이 암내 비슷한 향신료가 비위에 거슬렸지만 여자에게 '부대찌개'가 먹고 싶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주문이 서툴렀던 탓에 두 사람은 음식을 많이 남겼고, 남자는 식당을 나오며 7만원이 넘는 밥값을 카드로 결제했다.

- 성탄 특선



어머니는 국수를 눈 감고도 썰 수 있었다. 오른손이 칼질을 하는 동안 왼손 손가락 두 개는 칼 박자에 맞춰 아장아장 뒷걸음쳤다. 어머니의 칼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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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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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곧 가판 위의 도마에서 멈췄다. 어머니의 칼 앞에서였다. 칼은 도마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조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닳고 닳아 종이처럼 얇아졌지만, 여전히 신랄하고 우아한 빛을 품은 채였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식욕이 밀려왔다. 뭔가 베어 먹고 싶은 욕구. 내장을 적시고 싶은 욕구.

- 칼자국



신림 - 하면 푸른 숲이 떠오른다. 나무가 많은 숲 그리고 젊은 숲. 그 숲의 나무들은 모두 지하철 2호선을 표시하는 연녹색을 띠고 있다. 보통의 나뭇잎은 그보다 짙지만 어쩐지 신림의 나무들만은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신림, 하고 소리 내면, 먼 곳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흔들리며 '수풀 림, 수풀 림' 하고 울어대는 것 같다. 신림, 하고 발음할 때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 구파발이라 읇조리면 내 가슴 어딘가에 꽂힌 붉은 깃발이 마구 펄럭이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신림 진짜 구파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 어디야?
나는 다 왔다고 한다. 언니가 일러준 대로 역 앞 정류장에서 5515번을 탄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데, 왠지 모르게 그들 모두가 서울대학교 학생처럼 느껴진다. 존경하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존경심이 일어난다. 창밖으로 보이는 신림은 생각만큼 푸르지 않다. - 중략 - 은행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거리는 지방 소도시 몇 개를 기워놓은 듯하다. 낡고 일관성 없고 잡지처럼 산만하다. 그리고 왠지 시간이 고여 있는 느낌이다. 신림뿐만 아니라 서울 대부분의 거리가 그랬다는 기억이 난다. 이것저것을 오려다 마구 붙여놓은 느낌. - 중략 - 어쩐지 이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풍문처럼 느껴진다.

*

가게 간판에 '서울대학교 연구팀이 인증한 인진쑥을 먹여 키운 돼지'라는 문구가 크게 씌어 있다. 서울대와 돼지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지만 왠지 학구적인 식당에 들어온 기분이다.

*

'수도가 이래도 되나?'
수도니까 그런 것도 같다. 잿빛 나무들은 미동도 않는다. 신림동 고시 인구가 2만 명 정도 된다던데. 여기를 지나간 이들 모두가 일제히 숨죽이며 살았겠구나. 2만 명의 침묵, 2만 명의 뒤꿈치, 2만 명의 불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게 어떤 공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몇 십 년간 반복되었다는 것이.  

- 기도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 중에서.

by Wendy | 2008/01/07 16:36 | 달의 서재 - 밑줄 긋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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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정서현 at 2008/03/07 20:44
오- 처음 와봐 +_+ 대단하다 이런홈피는 어떻게 만들었어?
이 소설집 나도 봤는데 너무 좋았어!
문장이 너무 신선하면서도 팍팍 와닿는 것이..
특히 나는 '칼자국'이 좋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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